四柱命理哲學    [재미있는점복이야기] - 조선의 점복술 2008/01/31

조선조에는 초기에 고려의 제도를 모방하여 관상감이라는 정삼품 관서를 두고,오로지 천문,지리,역수,점주,측후,각루 등의 일을 관장토록 하였다.

조선조의 법전을 집록한 <대전회통>에 의하면 이 관아는 천문학,지리학 교수,겸교수 직장,봉사,부봉사 ,명과학훈도, 참봉등 20 명의 직원으로 구성되어 천문,풍수,역사,기상,시계 및 점서의 일에 종사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점서의 일은 명과라 칭하였고 점복에는 오래도록 맹인을 임명했었는데 이 <대전회통> 예전제과에 의하면 이 명과는 음양과의 한 분과 로써 명과학에 통한자로 처음에는 4명 후에는 8명을 국가시험에 의해 선발 임용하였다.

한편 이 조선의 명과인 점복은 어떤 것이었을까?조선조 7대 세조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예조판서에 이른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서 그 일면을 찾아보도록 한다.

"우리나라의 명과류는 맹인이 이를 모두 행한다. 국초에 진이라는 복자라 있었는데 능히 둔갑술을 하였다. 하루는 이 진이 궁궐안에 홀연히 나타나서 상을 알렸했다 상께서 하문하셨다.
"궁궐 단속이 엄하거능 그대는 어떻게 들어왔는고?"진이 삼가 아뢰었다.
"신은 둔갑술로 들어왔나이다 궁위들은 모두 모르옵니다. 오늘은 이 신의 명이 다하는 날이옵지요 바라건데 상감께서 구해주시오소서"
상이 말씀하였다.
"너는 비술을 가지고 궁궐에 잠입했아. 네 죄가 중한 것을 알렸다. 용서할 수 없노라" 그 즉시 진을 줄였다.

그후 김학루란 자가 있어 명경수(점서)를 잘 알았다.또 김숙중이란 자가 있어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어느날 생원 박운손이 관비와 간통하다가 질투하여 그 관비의 본남편을 죽였다. 사죄로 다스려져 투옥되었다. 문초하는 날 형조의 낭관들이 모두 모였다.
김숙중이 그 옆에 있다가 길흉을 이야기 한다.
정랑 노회신은 부호로써 한때 도도하게 지냈다 그라 뒤돌아보며 김숙중에게 말했다
"죄수의 목숨이 조석지간에 달려있는데 형을 면한다니 말이나 되겠는가?"김숙중은 앞일을 길게 추명하고 말했다
"그는 형을 면할 뿐만 아니라 관도광원하여 환해를 받는 일도 없고 정랑의 목숨이 오리려 그와 같겠노라"고  과중은 모두 김숙중의 맹랑함을 비웃었다. 그후 박운손은 형을 받게 된날 도중에서 면형되었으며 나중에 관삼품에 이르렀고  나이70이 되어서 죽었다. 노회신은 어이없이 요절하였다.

선군은 김숙중과 친하게 지냈다. 그때 연세 많았고 질병을 얻어 임종이 가까왔다.김숙중을 불러 길흉을 묻고 이어서 장형과 차형의 명을 물었다.
김숙중이 말했다 . 장형은 복록이 장구하고 관은 이조판서에 이를 것이라고, 또 형은 청귀하기 누구도 따르지 못하리라고 나는 복록이 장형과 상등하고 영화는 그보다 더한즉 호랑이 굴에 들어가더라도 무사할 것이라고 하였다 과연 그 말대로 되었다.

한편 당시의 학자 서거정은 일찍이 세조와 점복에 대하여 문답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녹명이라 하여 오늘날의 사주점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서거정은성현과는 달라서 사주따위는 결코 믿을 바라 못된다며 일축했다.  위로는 왕까지 점복 신앙을 두드러지게 믿었던 당시에도 이를 부정하는 자가 있음을 나타내 준다.

한편 명과를 하는 맹인 즉 맹복자는 선사라 불었다고 기록되있다.
또 집에서 점을 보는 사람을 가리켜 복서자라 하였는데 단지 집안에서 사주를 물으러 오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기만 했던것이 아니라, 생업을 이룰 수 있을 정도였다는 점에서 볼때 역자로써 가두에까지  진출했을 만큼 성했으며 ,  그 성황은 마침내 점복으로 피흉추길을 할수 있다하여 의약과 함께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요사항이 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학문하는 사람들까지  이론을 연구에서 부터 스스로 점복을 행하는 상태였다.
정조때 사람 정약용은 목민심서의 저자로거 조선조 후기의 저명한 학자이자 경제가 인데 그 역시 <역학서언> < 복서통의>등의 점서를 지어냄과 동시에
세상의 공민교육의 자료로 삼았고 <산림경제>에서도 각종 점복을 그대로 게재하고 있다.

그 예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정상과 요얼 - 무릇 그 집안의 장래가 흥하려고 하면 반드시 정상(경사롭고 복스러운 징조 )이 있다. 장래에 패망하려고 하면 반드시 요얼(요악한 귀신의 재앙. 또는 재앙의 징조)이 있다.
그러므로 요얼이 보이면 황급히 덕을 쌓아서 스스로 재화를 면해야 한다.

2.맥점 - 보리 한 줄기에 이삭이 두개 붙으면 이를 기맥이라 부르는데 이것이 있는 밭 주인은 날로 반드시 취진한다.

3.자연소 - 제비가 와서 집을 지으면 그 집주인은 날로 부유해진다.

4. 연소 - 무릇 연소를 오래, 그리고 크게 짓는 집의 주인은 길상이다. 문이 북쪽으로 향하는 것은 그 집 사람이 흥하고 다시 전잠에 이익이 있다.

5. 작접 - 까치가 와서 집 남쪽에 집을 지으면 그 집주인은 당년에 경사가 있다. 방해한다면 집주인에게 응보가 가해진다.

6.묘점 - 고양이 새끼가 들어오면 질고(곳간)가 열린다.

7.구점 - 개 새끼가 스스로 들어오면 주인은 점점 부유해진다.

8. 서랑점 - 쥐가와서 구멍을 파면 그 집은 장길하다.

9. 사점 - 뱀이 껍질을 벗을때 사람이 이를 보면 그 사람은 크게 족적을 남긴다.

10. 완점 - 스스로 깨진 그릇이 상하 두쪽이 나면 이를 무저완이라고 한다. 위조각안에 고어를 써서 동쪽 벽에 붙여놓으면 이를 상서라 하며  3년 이 안되어 부를 이룬다.

11.지주점 - 무릇 인가의 거미줄이 많은 것은 쇄하는 조짐이다. 뜰안이 보이는 곳에 거미줄이 쳐져 있으면 붙잡혀가거나 멀리 갈 징조이다.

< 산림경제>의 이것은 일반교양없는 민중을 대상으로 하여 저작된 것이다.
비록 수중 낮은 민중을 대상으로 한 것이더라도 경국제민을 자임하는 학자가 위와 같은 점복습속을 태연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볼때  당시의 세상풍조가 점복을 얼마나 강하게 믿는지를 알 수 있다.
많은 학자들도 이런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의 점복습에 관한 몇가지 예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결혼을 점치는것
결혼을 점복에 의해서 결정하는 것은 현재에 있어서도 성행하고 있는데 조선시대에도 그러했다.그것에 관한 사례를 혜아릴수 없다.

이것은 이능화의 <조선여속고>에서 발췌한 것이다.이능화씨는 "우리 습속에딸을 시집보내려면 먼저 운명을 점치는데 이는 고려 때부터의 유풍으로
조선조 초기에는 이 풍속이 성행하여 그계가 많았다"고 말한다음 다음을 인용하고 있다.

<세종 때 남지라는 사람은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고 충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안평대군이 공과 혼사를 의논했다 공은 말했다. " 제여식이 있으나 용모가 추하여 대군의 며느리 감이 못되니 다른데서 알아보십시오"
그러자 안평대구이 " 내가 어찌 가리겠소.상공은 그런 말씀 하지 마시오 .부인의 연추에는 내 개의치 않겠고" 라고 공이 말했다
공은 거절했으나 안평대군이 듣지 않자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말했다
"하양의 장님 김학로를 만났습니다. 그는 점을 잘 치는데 저의 길흉을 점쳐본 일이 있습니다.그가 말하기를 대감의 두 딸은 모두 홀로되어 평생 고생이 많겠다고 하더군요, 이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큰딸은 임영군에게 출가했다가 지금 과부가 되어 수절하고 있으며 말씀하는 아이는 둘때 딸 입니다."안평대군은 웃으면서 말했다.
"상공은 어찌 무복의 말을 믿는단 말이오?특히 대인은 요설을 버려야 하거늘"
공은 이말을 듣자 승낙하였다.
이 해에 안평대군의 아들 우직은 공의 딸을 취했는데 이듬해 임신공은 풍질을 얻어 말을 못하게 되어서 일도 하지 못했다. 그 다음해인 계유 안평대군이 죄를 얻은 것도 , 공이 체포된 것도 이 병 때문이다. >


<세조때 병조판서를 지낸 남이는 선산위 남휘의 아들이며 태종애왕의 외손으로서 효용이 실로 절륜하였다.
좌의정 권람은 남이의 강용에 감탄하여 그의 넷째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려고 생각했으며 남이의 운세를 점자로 하여금 점쳐보도록 하였다.
점자는 이 사람은 귀인이 되겠으나 애석하게도 횡사를 면할 수 엇을 것이니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고 점쳤다.
다른 복자에게 딸의 운명을 점치게 했던바.이 사람은 단명하여 반드시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것이라며 그 복은 함께 향수하지만
그 화 를 함께 겪지 않을 것이니 약혼하는 편이 좋겠다고 점쳤다.
권람은 후설에 따라 남이와 넷째 딸의 약혼을 성사시키었다.
그후 남이는 17세때 무과에 급제했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했으며 건주의 적도를 평정했다.
그는 군공에의해 병조판서에 발탁되었다.
그런데 예종때 간신 유자광이 남이의 재능을 시기하여 남이가 북정때 지은시를 모함하여 남이는 모반을 도모하고 있다고 참무하여 죽게했다.
이때 남이는 28세였으며 그 아내였던 권람의 딸은 복자가 점쳤던 대로 몇 해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었다.>

2.몽점의 습속

꿈으로 그 사람의 운명을 점친 것은 조선조에도 어느 시대에 못지 않게 성행하였다.

<석왕사연기>에 의하면 조선조의 태조가 고려왕 신우10년 , 양위를 받아 역성왕위에 오르기 8년전 안변이란 곳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꿈에 동네의 닭이 동시에울고,다듬이 소리가 동시에 들려오는데 , 자신이 오래된 집에 들어가서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오니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지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
태조는 이 꿈의 길흉이 마음에 걸리어 동네 노파에게 해몽해줄 것을 부탁했으나 노파는 잘 모르겠다며  이곳으로부터 약 4마장 떨어진 곳에 설봉산이 있고 그곳에는 이상한 승이 있은즉 그곳에가서 알아보라 하였다.
그래서 태조는 설봉산에 올라가 그 승을 만나 꿈의 길흉 판단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승의 표정이 바뀌더니 말을 하였다.
"이는 군왕이 될 꿈이오다.즉 만가의 닭이 운것은 고귀한 자리를 경하하는 소리며,천호의 다듬이질 소리는 그것이 가까워졌음을 의미합니다.
꽃이 떨어지면 열매를 맺고 거울이 깨지면 소리가 나며 세 개의 서까래를 진 것은 왕(王)  자 입니다.
꽃도 거울도 이 왕업의 성공을 축복한다는 의미지요 이제 공의 상을 자세히 보니 만면이 군왕의 상이오.오늘 이 일은 삼가 누설치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태조는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하며 보수를 얼마나 주면 되겠냐고 물었으나 그 승은 만약 공이 왕위에 오르시거든 이곳에 절을 하나 지어서 오늘의 이 일을 기념하며 석왕사라 이름지으시면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 승이 곧 후일 무학국사이며 이 절은 오래도록 조선 왕가의 기원소가 되었다고 한다.

최한이라는 사람이 학우와 함께 지방에서 치러지는 향시를 보러가던 도중, 말위에서 수양버들가지가 말목에 휘감기는 꿈을 꾸었다.
이상히 생각한 그가 학우에게 그 이야기를 하자 학우는 그것을 청개 ( 급제한 사람에게 내리는 관)이니 길조라며 그 꿈을 팔라고 했지만
팔지 않았다. 그런데 과연 최한은 향시에 급제하였다고 한다.

주세붕이라는 사람은 그 어머니가 병에 걸려 생명이 경각에 달했을때,하늘에 치성을 드리니 그날 밤 꿈속에 웬 사람이 나타나서 백사 8냥을 주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일단 병이 나았고 80일째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8냥이란곧 80일 연명의 조짐이었음을 알았다.

조선의 성웅 이순신이 태어나기 전, 그 어머니 변씨가 꿈을 꾸었다.
그 꿈에 시아버지가 나타나더니 아이가 태어나면 반드시 큰 동량이 될것이니 그 이름을 순신이라고 지으라 했다.
이순신의 어머니는 이를 이순신의 아버지에게 말했고 아버지는 이를 점쳐보았던바,길운으로써 나이50이 되면 대장군이 된다는 것이었다.

3.매장할 날짜를 점치는것
일을 처리함에있어 길흉의 날을 택했던 것은, 특히 인생의 대사 중 장례 때에 두드러 졌다.
율곡 이이선생의 이 풍습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명종왕이 세상을 떠났을때, 선조왕 원년 8월10일에 장례지내는 것이 좋다고 했던바, 일관이 이를 불길하다고 했음으로 대신들이 상의하여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그래서 왕대비가 하교하여 무릇 길흉은 천명에 달려 있는 것이너늘 일관이 하는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며 10일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대신들이 반대하자 대비는 하는 수 없이 10월 15일에 매장하라고 명하면서 또 대신에겐 불길하다고 운운하지 말라 하여 대신들이 듣기는 하였으나
선군의 영을 모시는데 흉일을 택한다며 재천의 영에대하여 예가 아니라며 고집을 했음으로 대비도 이에 따랐던 것이다.

이일을 들어 율곡이이가 평하되 대비는 여성인데도 불구하고 올바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건만 대신들이 미신을 중시하는 것은 꼴볼견이라며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이태조가 고려왕씨를 대신하여 조선의 왕위에 오르자 곧 개성을 버리고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이것은 고려 왕씨가 신라를 대신하여 건국했을때 신라의 도읍이었던 경주를 버리고 새 국도를 송도로 정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역세천도의 선례에 의한 것이며 , 또 국도를 새 곳으로 옮긴다는 거은 전조의 구도에서 신정을 펴는 것보다는 인심을 장악하여 신정으로 전향시킨다는 극히 정략적이 계책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한양천도의 동기가 신도를 열어서 백성의 인심을 새롭게 하려는 의도뿐이었다면 이태조는 고려의 군신들에 의해 옹립되어 즉위했었으니
천천히 길지를 보고 그곳에 신도읍을 건설한 연휴에 천도해도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태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 해에 이미 천도의 의지를 발표하고 서둘러 3년 동안 지방을 순시하며 신도읍의 후보지의 적절여부를 검토하는 한편 군신들과 여러차례 의논하였다.

그리고 군신들의 대부분이 반대와 시기상조론을 들오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강행하여 한양에 신도읍을 정하고 신도읍의 조영이 반도 채 안되었을때 천도를 가생하였다. 신도읍니 국도다운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천도하고도 얼마후의 일이 었으니 성급하게 서둘었던 것이 사실이다.

다음은 이에관한 이야기를 쉽게 설명한것이다.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도읍을 한양으로 옮길까 하여 한양부에 있는 고려의 옛 궁을 수리하도록 하였으나 태조의 계획은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고려의 옛궁은 몹시 낡았사옵니다.  더구나 성곽이 완전하지 못하여 새 궁궐로 쓰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줄 아뢰옵니다."
"이제 곧 겨울입니다.  이러한 때에 도성을 옮기면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옵니다."
조정대신들 모두 개성(고려의 옛 수도)에 터를 잡고 살던 터라,  태조 이성계의 계획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도읍을 새 곳으로 옮겨 새 정치를 펴고자 했던 이성계의 계획은 처음부터 빗나가기 시작했다.  이듬해 봄이 되자,  신하들 사이에서 새 도읍지로 계룡산이 좋다는 주장이 나왔다.
태조는 무학 대사와 함께 친히 계룡산을 찾아가 자세히 둘러보니 정말 계룡산은 천하 제일의 명당자리였다.
기쁜마음으로 돌아온 태조는 계룡산에 궁궐을 짓고 도성을 쌓으라느 명령을 내렸으나 이 계획도 얼마 못 가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계룡산은 흉한 땅입니다.  그 곳으로 도읍을 정하면 얼마 안 가 나라가 망하게 되옵니다."
이번에는 풍수 지리를 잘 아는 신하들이 계룡산을 도읍지로 삼는 것을 반대하고 나섰다.
많은 신하들이 이성계의 뜻이 옳다고 생각하였으나, 하정 류관이 상소를 올렸다.
"태조 대왕께서 계룡산 부근을 도읍지로 삼으심은 옳지 않으신줄 아옵니다.  도읍지라 함은,  첫째는 땅이 넓고 편편해야만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배가 다닐 수 있는 강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거리가 어디든지 비슷한 나라의 중심이어야 백성들이 나라의 혜택을 고루 입을 수 있습니다.  이와같은 조건을 갖춘 한양이 도읍지로 적당한 줄로 아뢰옵니다."
류관의 설명을 들은 이성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생각이 깊소.  많은 중신들이 나의 눈치만 살피며 바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 류관 만은 나의 뜻에 반대하여 도읍지로 한양이 적당한 이유를 설명했소,  내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도록 해 줘서 고맙소."
이성계는 그의 주장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논리가 너무나 분명하고 뚜렸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태조의 꿈에 흰 옷을 눈부시게 차려 입은 신선이 나타나 말하였다.
"계룡산은 정씨 성을 가진 이가 도읍지로 쓸 땅이나,  너는 그곳에서 물러나도록 하여라."
꿈에서 깨어난 태조는 계룡산에서 진행 중이던 도성과 궁궐 공사를 중지시키고, 천문 등을 맡아 보던 관아닌 서운관에 소장된 기록들을 다 살펴보고,  도읍지로 가장 좋은 땅을 다시 찾도록 하였다.
그렇게 해서 찾은 곳이 모악이었다.  모악은 지금의 서대문구에 있는 안산을 이르는 말이니,  지금의 연희동과 신촌동 일대가 도읍지로 추천된 것이었다.  
하지만 모악은 너무 좁아 한 나라의 도읍으로 쓰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이 무렵 한양 땅이 다시 새 도읍지로 떠올랐다.  이성계는 무학 대사로 하여금 한양의 땅 모양을 자세히 살펴보게 하였다.

무학대사는 새 도읍지가 될 만한 곳을 찾아 돌아나녔지만 마땅한 곳이 없어, 어느덧 한양 근처에까지 오게 되었다.
하루는 무학대사가 지형을 살피는데, 웬 백발 노인이 소를 타고 지나가며 중얼거렸다.
"이놈의소는 미련한 게 꼭 무학을 닮았구나."
무학대사는 깜짝 놀랐다.  무학이라면 자신을 일컫는 말 아닌가.
"어리석게 좋은 곳은 놔 두고, 왜 엉뚱한 곳만 찾아다니노."
무학대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노인에게 다가갔다.
"노인장, 아까 소에게 말씀하시길 미련한 것이 무학과 같다고 하셨지요.  소승이 바로 무학입니다.  혹 저를 두고 하신 말씀인지요.?"
노인은 그저 소만 바라볼 뿐 아무말 없었다.
"소승은 지금 새 도읍지가 들어설 명당 자리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좋은 터가 있으면 좀 가르쳐 주시지요."
그러자 노인은 무학 대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손을 들어 동북쪽을 가리켰다.
"여기서 십 리를 더 가시오."
"동북쪽으로 십 리 말이옵니까.?"
"그렇소 그 곳에 가면 아마 새 도읍으로 쓸 만한 명당자리가 있을 것이오."
노인은 말을 마치고 서둘러 소를 몰고 가는 것이었따.

무학대사는 노인이 가리킨 곳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뒤를 쫓아갔다.
"노인장께서는 어디 사는 뉘신지요?"
"나는 무학봉에 사는 사람이도."
노인은 빙그레 웃더니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무학대사는 노인이 말한 무학봉으로 올라갔다.  그 곳에는 작은 암자가 하나 있었는데,  
노인은 간데없고 도선대사의 화상만 모셔져 있었다.  바로 그 노인은 신라 말 풍수지리설의 대가인 도선대사였으며,  죽은 영혼이 잠시 나타나 무학대사에게 명당자리를 가르쳐 준것이다.
무학대사가 동북쪽으로 십 리를 더 가니, 그 곳이 바로 북악산 및 경복궁 터였다.

이렇게 해서 한양 천도가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 때가 태조 3년인 1394년 11월 29일의 일이었다.  



잠실을 다른 말로 '누에벌'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 곳에서 누에를 많이 쳤다는 기록은 없다.  단지 누에의 먹이가 되는 뽕나무가 무성한 밭을 이뤘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태조때의 일이다.  풍수지리에 밝은 한 신하가 태조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임금님, 남산의 생김새가 꼭 누에 같사옵니다.그래서 남산을 잠두봉이라 부르옵니다. 잠두봉은 풍수지리상 잘 길러 주어야만 나라에 불행이 없고, 번창하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는 것이 잠두봉을 잘 기르는 것이오?"
"남산 주위에 뽕나무를 많이 심어야 하옵니다."
이렇게 해서 동서 남북 사방에 뽕나무 밭인 잠실이 생기게 되었다.
동잠실은 아차산 아래의 한강변 일대였다. 서잠실은 서대문 밖 연희동 일대이며, 남잠실은 여의도 위쪽에 있는 밤섬이었다.
북잠실은 선잠단이 자리잡고있는 지금의 성북동 일대였다.  이밖에도 지금의 잠실동과 잠원동 일대가 신잠실이었는데,  지금까지도 이곳에는 수백 년 묵은 뽕나무가 남아있다.
한남대교를 지나 반포쪽으로 가다 보면 길 오른편에 검게 그을린 고목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나무는 성종때 일군 잠실의 뽕나무로,  500년이 넘은 것이다.
예부터 아이를 못 낳는 부인네는 뽕나무 아래에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뽕나무는 해를 상징하고, 해는 남자를 뜻하므로 그 아래에서 기도를 드리면 아이를 낳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원동의 뽕나무도, 기도 드리던 부인네가 켜 놓은 촛불이 나무에 옮겨 붙어 검게 그을린 것이라 한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누에를 닮은 남산을 잘 기르면 나라가 번창한다는 풍수지리학자의 말이 어느 정도 맞아 떨어졌다는 사실이다.
조선시에에는 특히 세종, 성종, 영조때에 태평성대를 이루었는데, 이 때에 양잠 장려 정책을 펼쳐,  잠실벌의 뽕나무가 가장 무성했다고 한다.
지금의 잠실에는 '삼전도비'가 서있었다.  이 삼전도비는 병자호란때 청나라 태종이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기의 공덕을 자랑하기 위해 세우게 한것이다.  
우리로서는 매우 치욕적인 비라고 할 수 있다.  비의 높이는 약 4미터,  폭은 1.4미터에 이른다.  비석의 윗부분에는
'대청 황제 공덕비'라고 새겨져 있다.  사적 제 101호로 지정된 삼전도비는 잠실 지구 개발사업에 밀려 현재 강동구 석촌동으로 옮겨 세워졌다.
조선시대의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는 잠실은 1970년대에 이르러 그 모습이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1971년에 시작된 잠실 지구 개발 사업으로 넓은 갯벌이 흙으로 메워져, 홍수 때마다 겪던 물난리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30만명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넓은 아파트 터도 마련되었다.  또한 잠실도 남쪽으로 흐르던 강물을 막아,  섬이었던 잠실이 육지로 변하였고,  
수많은 사람을 실어나르던 송파 나루와 광 나무로 모두 육지로 변하였다.
아울러 이 곳에 종합운동장, 야구장 등의 체육시설이 들어서게 되었으며,  1988년에는 제 24회 올림픽 대회가 열려 우리나라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기도 하였다.
누에 모양의 남산을 살리고 또한 나라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일구어진 잠실벌이, 잠실 지구 개발사업으로 그 역할을 더욱 훌륭히 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인터넷 발췌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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