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柱命理哲學    [재미있는점복이야기] - 고려의 점복술 2008/01/30

왕(王)씨 발상전설안의 대표적 점복습속

역성혁명내지 위인의 탄생등을 하늘의 뜻으로 돌리고 이것을 미화 하고자하는 것은 동서어느 민족에게서나 발견 할 수 있는 습속이다.
고려 왕씨의 발상 전설은 아주 흔한 점복에 관한 사항을 집어넣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발상 전설은 고려 초에 있어서의 점복습속 일체를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호경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스스로 성골장군이라고 칭하고 백두산에서 세를 떨치고 ,  부소산에서 좌곡에 이르러 아내를 얻고 가정을 이루었다.
부유했으나 자식이 없었다. 활쏘기를 좋아하고 사냥을 일과로 삼았다. <중경지>

하루는 같은 마을 사람9명과 평나산에 가서 매를 잡았다.
때마침 날이 어두워져서 바위굴로 들어갔다.그곳에서 묵기로 했던 것이다.
10명은 서로 의논하기를 호랑이가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하니 관(머리에쓰는)을 던져보되 그것을 호랑이가 물거든 그 임자가 나가기로 합의하고 모두 관을 벗어서 던졌다.
호랑이는 성골의 관을 물었다 .성골이 달려가서 호랑이와 싸우려고 하니 호랑이는 홀연히 사라졌고 바위굴이 무너졌다.9명은 모두 나올 수 가 없엇다.
성골은 돌아가서 평나군에 이 사실을 보고하고 돌아와 9명을 장사지냈다.

먼저 산신에게 제사지냈다.그때 산신이 나타나서 말했다.
" 나는 과부로써 이 산을 다스렸다.다행히 성골장군을 만났으니 부부가 되어 함께 신정을 펴겠다. 청하건대 이 사람을 봉하여 이산의 대왕이 되도록하라"
말을 끝내자 성골과 함께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군 사람들은 성골을 봉하여 대왕으로 삼고 사당을 세워 이를 제사지냈다.
호경은 옛처를 잊지 못하여 밤마다 꿈결같이 오가더니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을 강충이라고 한다.

강충은 체모가 단엄하고 재예가 많았는데 서강 영안촌의 부잣집 딸 구치의를 맞아 장가들고 오관산 마하갑에서 살았다.
당시 신라의 감우팔원이란 사람이 풍수를 좋아하여 다니다가 부소군에 이르렀다.
부소군은 부소갑의 북쪽에 있으며 산세가 좋으나 동산임을 보고 강충에게 말했다.
만약 이 군을 산남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서 암석이 튀어나오지 않게 하면 곧 삼한을 통합하는 자가 나올 것이라고 "
그야 어쨌은 강충은 군 사람들과 거처를 산남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무성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군명을 송악군이라 고치고 이윽고 구의 상사찬이 되었으며 마하갑을 영업의 땅이라 부르며 왕래하였다.
집안에는 천금을 쌓았고 두 아들을 낳았다.
작으 아들은 즙호술이라 불렀는데 후일 이름을 보육이라고 고쳤다.

보육은 성질이 자혜로왔는데 출가하여 지리산으로 들어가 수도하고 돌아와서 평나산의 북갑에 살다가 다시 마하갑으로 옮겼다.
그런데 꿈속에서 곡령에 올라가 남쪽을 향하고 소변을 보니 삼한땅이 넘치고 산천이 변하여  은빛바다가 되었다.
다음날 그 형 이제건에게 꿈이야기를 하자 이제건이  " 너는 틀림없이 지천의 기둥감을 낳을 것이다"
보육은 그의 딸 덕주를 맞아 아내로 삼았다. 그리고 거사가 되어 마하갑에 목암을 지었다.

신라의 술사가 있어서 이를 보고 이곳에 살면 반드시 당의 천자가 와서 사위가 될 것이라고 했다.후일 두 딸을 낳으니 ,작은딸을 진의라고 불었다.
아름답고 재지가 많았으며 나이가 들어 출가할 때가 되었다.
그의 언니 꿈에 오관산마루에 올라 소변을 보니 천하에 넘치었다. 꿈을 깬 언니가 진의에게 꿈이야기를 해주었다.
진의가 말했다.청컨대 비단치마를 주겠으니 그 꿈을 팔라고 ㅡ
언니는 꿈을 동생에게 팔았다. 진의는 다시 꿈이야기를 듣고 이를 품에 안기 세파례~그 후 마음에 꼭 새겨두고 자부하였다.
한편 당나라 숙종황제는 잠저에 있으면서 널리 산천에서 놀리를 좋아했다.
천보12대 계사봄, 바다를 건너 패강의 서포에 도달했다.조수는 밀려나갔고 강가는 진흙투성이인데 시종이  동전을 거두어 포에 싸가지고 강가에 올라갔다.
그후로 이 강어귀를 전포라고 하게 되었다.

마침내 송악군에 이르러 곡령을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땅에 반드시 도읍이 설 것이다.
따르던 자가 말했다 " 이 곳은 실로 팔선녀들의 집입니다."
그는 마하갑의 양자동에 이르러 보육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의 두딸을 보고 기뻐하며 동침을 허락해달라고 청했다.
보육은 이들이 중화의 귀인임을 알고 과연 부술사의 말과 같다며 마음속으로 좋아했다.
곧 장녀를 명했으나 응하지 않았음으로 민망하여 그 대신 진의를 시켜 동침케 했다.
머무르기를 여러 달 만에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별할 때가 임박해서야 말했다
"나는  당나라의 귀족이요 " 그리고 궁시를 주면서 말했다 "아들을 낳거든 이것을 주라"고
과연 아들을 낳으니 작제건이라 불렀다.
후에 보육을 추존하여 국조원덕대왕이라 했으며 그 딸 진의를 정화왕후라고 했다.

작제건이 어렸을때 총명하고 신용하여 나이 5,6 세때 어머니에게 물었다.
우리 아버지는 누구신가요? 그 어머니는 말하기는 당나라사람이라고 하였고 아직 그 이름을 모른다 하였다.
자라감에 따라 육예를 겸하여 서사도 더욱 절묘해졌다.
그의 나이 16세가 되자 어머니는 아버지가 주고 간 궁시를 주었다. 작제건은 크게 기뻐하며 이를 쏘니 백발백중하여 세상에서는 그를 신궁이라고 불렀다. 그는 아버지를 보고 싶어했다.

상인배를 얻어타고 바다로 나아가 당나라에 갈려고 했다. 바다에 나서자 배가 선회하여 앞으로 나아가지를 않는다.
뱃사람은 두려워하며 벙거지를 던져서 길흉을 점치자고 했다.마침 작제건의벙거지가 물속에 가라 앉는다.
뱃사람은 식량을 들려 작제건을 섬에 내려놓고 배가 돌아올때까지 기다리라 하였다.
작제건은 혼자 섬에 머물었다. 한 동자가 물속에서 솟구쳐나오더니 하는말이 "용와이 작제적을 만나길 원합니다"고 하였다.
청컨데 무조건 오라는 것이었다.작제건은 그를 따라서 물속마을에 이르러 한노옹을 만났다.
노옹이 말했다  " 나는 이곳에 산 지 오래인데 요즘 한 백룡이 나타나서 내 집을 빼앗으려 하는데 내일 결전을 약속하였네,
자네가 궁술을 발휘하여 나를 도와주게" 작제건이 물었다"무어으로 그 때를 알 수 있습니까?" 노옹이 대답했다
"내일 정오 , 비바람이 몰아치고 파도가 세게 일것인데 그때가 바로 결전을 할 때일세 싸움이 한창 어우러 질때 각각 등을 보일 것이야 , 등이 푸른 것이 나이고 하얀것은 백룡이지"
작제건은 승낙하고 섬으로 나와서 이를 기다렸다. 과연 다음날 노옹의 말대로 되었다. 작제건은 섬에 있으면서 활을 겨냥하여 흰놈을 쏘았다.
잠시 후 날씨는 개었고 파도도 가라 앉았으며 동자가 나와서 다시 작제건을 데리고 물속마을로 데려갔다.
노옹은 소녀를 내어주며 아내로 맞으라면서 말했다 "그대는 귀한종자다.고향으로 돌아가서 스스로 대조가 되어라"
얼마동안 머무르게 했다가 아내와 함께 작제건을 섬으로 돌려보냈다.

마침 상선이 왔다.그는 용녀를 데리고 창릉에 도착했다.
태수는 작제건이 용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데리고 왔다는 것을 알자 물자를 내고 힘을 들이어 집을 짓고 그곳에 살게하였다.이어 창릉에서 다시 옮기어 송악밑에 살았다.< 이곳이 고려왕건이 있었던 만월대 고려의 궁지이다.>
처음 작제건이 용녀를 취할때 칠보를 얻어가지고 돌아러셔니 용녀가 말하기를 아버지에게 석장과 돼지가 있는데 이는 칠보보다 좋은 것이니 그것을 달라로 청하라는 것이었다.
작제건이 칠보를 내놓으며 원컨대 석장과 돼지를 달라고 청했다.
노옹이 말햇다 그 두가지는 내 신통이라.그래도 그대가 달라니 어찌 주지 않으리요 그리고 그 돼지를 주었다.

돌아온후 영안성에 거하기 1년동안 돼지우리에 넣지 않았다.그리고 돼지에게 말했다.
"만약 이 땅에 살지 않게 되면 나는 장차 네가 가는 곳을 따라가겠노라"고 그런데 그 돼지는 송악남쪽 기슭에 와서 누웠다.
그곳에 마침내 새 저택을 건축했다.이곳이 강충의 구거이다.

왕륭(작제건의 아들이자 왕건의 아버지)이 송악 구저에살때의 일이다.
신저를 그 남쪽에 또 세우려고 했다. 즉 연경궁 봉원전이 그 터이다.당시 도선이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풍수지리법을 배워가지고 돌아왔다.

도선 국사가 백두산에 올라갔다가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송악 근처를 지날 때 왕건의 아버지 왕륭(王隆)이 새로 집을 짓는 것을 보고
"제( , 느릎나무)를 심을 땅에 왜 마(麻, 삼베)를 심었을까?" 하자 왕륭이 도선을 극진히 대접하고 자문을 구하였다.
도선은 뒷산에 올라가 산수의 맥을 살펴보고 위로는 천문(天文)을 보고 아래로는 시수(時數)를 살핀 다음 말하기를 "송악산의 맥은 멀리 임방(壬方)에 있는 백두산에서 출발하여 수모목간(水母木幹)으로 뻗어내려 와서 마두(馬頭)에 떨어져 명당을 일으킨 곳이다.
그대는 수명(水命)이니 물의 대수(大數)를 따라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삼십육구(三十六區)로 만들고 송악산이 험한 바위로 되어 있으니 소나무를 심어 암석이 보이지 않게 하면 천지의 대수가 부응하여 명년에는 반드시 신성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왕건(王建)이라고 짓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선의 말처럼 1년 후 왕건이 태어났으며 그는 장차 성장하여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워 태조가 되었다
< 삼국유사>

이상은 고려왕씨의 발상 및 고려왕도 창정에 관한 대략적인 전설인데 글을 보아서 알수 있듯이 전문 거의가 점복적 사항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전설이 과장적 관념에 의하여 다분히 미화 되어있어서 왕씨 발상 및 국도창설의 실제 진상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 과장 분식에 점복적 사항을 집어 넣었다고 하는 시실은 고려점복이 인생의 운명을 예지하고
그 생활을 좌우하는 힘이 있다고 확실하게 믿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즉 당시에 있어서는 적어도 다수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의 희생자를 뽑을 경우에는 각자의 관을 던져본다든가,또는 벙거지를
물속에 던진다든가 하여 각자의 운명을 점쳤다는 사실이다.또 꿈에의하여 장래의 행운을 점침으로써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며 혹은 그 꿈을 팔고 사는가 하면
또 몽저으 믿고 객에게 딸을 내주는등 몽점의 풍조,혹은 돼지가 가는 곳을 따라가서 거처를 잡는 것과 같이 지상을 봄으로써 장래의 발목을 예지하는
풍수적 예언에 의존하는일등의 습속이 행하여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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